판디아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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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판디아 왕조는 기원전 3세기부터 14세기까지 남인도와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타밀 왕조이다. 초기에는 체라, 촐라와 함께 타밀라캄 지역에서 세력을 다투며 성장했고, 로마 등과 무역을 통해 번영했다. 7세기부터 10세기에는 팔라바, 찰루키아 등과 경쟁하며 전성기를 맞이했고, 13세기에는 남인도 대부분과 스리랑카를 통치하는 제국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14세기 초 델리 술탄국의 침략과 내전으로 쇠퇴하여 마바르 술탄국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텐카시 판디아로 명맥을 유지하다 비자야나가라 제국과 마두라이 나야크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판디아는 진주 채취를 중심으로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으며, 힌두교를 숭배하고 상감 문학을 발전시켰다. 미나크시 암만 사원과 같은 건축물 또한 판디아 왕조의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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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디아 왕조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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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현지 이름 | பாண்டியதேசம் |
국가 이름 | 인도 |
다른 표기 | பாணpianடyerதேசம் |
지위 | 해당 없음 |
존속 기간 시작 | 기원전 4세기 |
존속 기간 끝 | 서기 1650년 |
수도 | 코카이(초기), 마두라이(? ~ 1335년), 텐카시(1335년 ~ 1618년) |
공용어 | 타밀어, 산스크리트어 |
지역어 | 싱할라어 |
공용 문자 | 타밀 문자 |
국교 | 힌두교 |
기타 종교 | 불교, 자이나교 |
주신 | 시바, 미나크시 |
정치 체제 | 군주제 |
지역 | 타밀라캄 |
민족 | 타밀인, 싱할라인 |
국성 | 판디안 |
입법부 | 해당 없음 |
통치자 | |
칭호 | 벤탄 |
이름 | 네둔젤리얀 1세(기원전 270년경) 카둔곤(560년 ~ 590년)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1251년 ~ 1268년) |
사건 | |
사건 | 해당 없음 |
사건 날짜 | 해당 없음 |
면적 | |
면적 | 해당 없음 |
면적 어림년도 | 해당 없음 |
면적 순위 | 해당 없음 |
내수면 비율 | 해당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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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초기 남인도 지역에서는 체라, 판디아, 촐라 세 국가가 타밀라캄에 본거지를 두고 카루르, 마두라이, 우라이유르 등에서 부족 연맹 형태로 번성하였다.[22] 이들은 무지리스, 콜카이, 카베리 등의 항구를 통해 로마 등 유럽 국가들과 무역을 하며[24] 부족 연맹체에서 왕국으로 발전하였다.[25]
기원전 3세기경 북인도 마우리아 제국의 황제 아소카는 남인도와 스리랑카의 촐라, 판디아, 사티야푸트라, 케랄라푸트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26]
기원전 1세기 중반 하티굼파의 카라벨라 왕 석비에는 칼링가를 위협하던 '트라미라' 부족들에 대한 승리와 '판디아' 지방의 진주에 대한 언급이 있다. 당시 판디아는 진주와 비단 산업으로 유명했으며, 탐브라파니 강 유역의 콜카이 항에서 진주를 채취하고 알라간쿨람도 항구로 번성하였다.[27] 판디아에서는 동전들이 발굴되었고,[28] 기원전 2세기경 석비에는 왕실 보물에 대한 언급이 있다.[29]
판디아는 체라, 촐라 중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으며, 기원전 3세기 자료에는 판디아의 여왕이 세 부족체를 대표했다는 기록도 있다. 타밀인 지역 최고 중심지는 마두라이였다. 남인도 유적에서는 철제 용품, 상아 조각, 장신구, 로마 금화 등이 발견되었다.[30] 그리스와 로마는 기원전 1세기경 타밀계 국가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31] 타밀-브라흐미 비문에는 판디아의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의 역사가 간략히 적혀있다. 초기 판디아, 체라, 촐라는 칼라브라 왕국에 멸망당했다.[32]
6세기 말, 카둔곤 왕(590년 ~ 620년) 재위기에 판디아 왕국은 전성기를 맞았다. 벨비쿠디 동판에 의하면 카둔곤 왕은 칼라브라 왕들을 '파괴자'로 묘사되었으며,[34] 칼라브라가 쇠퇴함에 따라 판디아 왕국은 점차 세력을 키워나갔다.
6세기부터 9세기까지 남인도는 팔라바 왕국, 찰루키아 왕국, 판디아 왕국으로 나뉘었는데, 찰루키아는 라슈트라쿠타에 멸망당했다. 판디아는 팔라바 왕국과 동맹을 맺고, 여러 데칸 지방 왕국들과도 동맹을 맺어 세력을 확장했다. 9세기 중반에는 탄조르 동부 쿰바코남까지 영토를 넓혔다. 중기 판디아 3대 국왕 센단은 타밀나두 서부 체라 왕국까지 영토를 확장했고, 4대 국왕 아리케사리 마라바르만은 팔라바 왕국과 싸웠다. 나라심하바르만 1세는 판디아를 꺾었다고 자랑했다. 찰루키아 국왕 파라메스바라바르만 1세 비크라마디트야는 카베리 분지에서 팔라바와, 아마도 판디아와도 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34]
찰루키아 마지막 국왕 키르티바르만 2세는 판디아와의 전투에서 패배, 남부 통제권을 잃었다. 마라바르만 라자심하 1세, 네둔자다이얀 1세 등 판디아 국왕들은 팔라바를 위협했고, 특히 네둔자다이얀 1세는 팔라바를 침공, 타밀나두 서부와 베나두 지방을 정복했다. 스리마라 스리발라바 왕은 스리랑카섬 아누라다푸라 왕국으로 원정을 떠나 세나 1세를 죽이고 수도 아누라다푸라를 약탈했다.[34] 그러나 스리마라 스리발라바는 팔라바 왕국에 의해 왕좌에서 쫓겨났고, 아누라다푸라 차기 국왕 세나 2세는 보복으로 판디아를 공격, 수도 마두라이를 잿더미로 만들고 바라구나바르만 2세를 새 국왕으로 지명했다.[34] 825년경 베나두 지방이 판디아 지배에서 벗어난 것으로 추측된다.[34]
단티바르만 재위기, 팔라바 영토는 판디아 침략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난디바르만 3세는 강가와 촐라 도움으로 판디아 세력을 몰아냈다.[34]
촐라 제국은 카베리 삼각주에서 세력을 키워 탄자부르를 장악했다. 촐라 황제 비자얄라야는 850년경 무타라이야르(타밀나두 지방 귀족층)[35]를 공격, 탄자부르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 판디아는 카베리강 북부 통제력을 상실했다. 판디아 국왕 바라구나바르만 2세는 촐라로 진군했으나, 팔라바, 촐라, 강가족 왕 프리티비파티 2세 연합군에게 880년경 쿰바코남 인근에서 대패했다.
897년경, 촐라 황제 아디트야 1세는 팔라바, 강가, 콩구 지역을 지배했다. 아디트야 1세 후계자 파란타카 1세는 910년 촐라군을 이끌고 판디아를 침공, 수도 마두라이를 점령했다. 판디아 국왕 라자심하 2세는 아누라다푸라 도움을 받았으나 벨루르 전투에서 패배, 스리랑카섬으로 도주했다. 이후 판디아 왕실은 체라로 망명했다.
949년 라슈트라쿠타 연합군이 타콜람 전투에서 촐라를 격파하자, 남부 봉신국들이 독립하며 촐라 세력이 약화되었다. 판디아 국왕 비라 판디아는 아누라다푸라 국왕 마힌다 4세와 동맹, 촐라를 두 번 공격했으나, 촐라 황제 순다라 파란타카 2세에게 패배, 전사했다. 1005년경 촐라 황제 라자라자 1세는 판디아, 체라, 아누라다푸라 연합군을 격파하고 판디아를 마두라이에서 몰아냈다. 라자라자 1세 후계자 라젠드라 1세 때부터 판디아는 촐라 속국이 되었고, 촐라 출신 총독이 '촐라 판디아' 칭호를 받고 마두라이를 통치했다. 쿨로퉁가 황제 재위 초반, 촐라는 스리랑카 지배권을 상실했고, 판디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12세기 후반, 파라크라마 판디아 왕자와 쿠라세카라 판디아 왕자 간 내전이 발생했다. 스리랑카 왕국들과 체라 왕국은 쿠라세카라 편을 들었고, 라자디라자 2세, 쿨로퉁가 3세 등 촐라 황제들은 번갈아 가며 내분을 부추겼다.[36]
판디아 제국은 남인도 대부분과 스리랑카 전역을 통치했다. 판디아 황제는 마두라이에 거주하며 황실 방계 후손들을 지방 총독으로 보냈다. 황제 포함 황실 여러 남성들이 제국을 나누어 지배했으나, 황제가 독보적 통제권을 가졌다.[37]
13세기에는 '엘라쿠 나야나르 - 만인의 군주'라는 여러 황제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여러 판디아 황족들과 함께 국가를 다스렸으며, 13세기 중반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 재위기에 황권이 정점에 달했다.[38]
남인도에서 판디아의 우월성은 13세기 초 마라바르만 순다라 1세 때 확립되었다. 그는 1216년에 형 자타바르만 쿨라세카라로부터 황위를 계승했으며,[39] 촐라 제국을 침공하여 우라이유르와 탄자부르를 약탈하고 쿨로퉁가 1세를 몰아냈다.[40] 촐라 황제는 결국 마라바르만 순다라 1세에게 항복하고 그의 우위를 인정했다. 이후 즉위한 촐라 황제 라자라자 3세는 판디아 침공을 막고 독립을 위해 호이살라 왕국 나라심하 2세 도움을 받아 카베리 계곡에서 판디아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마라바르만 순다라 1세는 패배했지만, 라자라자 3세는 촐라 독립을 지켜냈다. 이후 촐라 라젠드라 3세는 판디아를 공격, 마라바르만 순다라 2세 포함 여러 판디아 귀족들을 꺾기도 했다. 호이살라 국왕 소메스바라는 판디아 도움을 받아 라젠드라 3세를 꺾고 촐라 제국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는 1251년 황위에 올랐고, 촐라 제국을 공격하여 스리랑카에서 케랄라 남부까지 진군했다. 호이살라 왕국 지배를 미조르 평원에서 쫓아냈다. 부유한 도시 칸치가 왕국 2번째 수도로 기능했다. 그의 원정 동안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는 자타바르만 비라 판디아 등 판디아계 고위 귀족들과 함께했다.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는 라젠드라 3세를 1258년경 억압, 공물을 강요했다. 1279년, 라젠드라 3세와 함께 촐라 통치도 끝났다. 판디아는 카베리에서 호이살라를 공격, 카나누르 코팜 요새를 무너뜨렸다. 호이살라 국왕 소메스바라는 미조르 평원으로 후퇴했다. 남북 위협에 소메스바라는 왕국 영토 반을 아들 라마나타에게 물려주었다. 소메스바라는 1262년 판디아 군대에 살해당했다. 라마나타는 카나누르 요새 탈환에 성공했다.[41][42]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는 카다바 지배자 코페룬징가 2세와도 분쟁을 벌였다.[43] 호이살라와 카다바 전쟁통에 바나 주와 콩구 주가 판디아 영역권으로 들어왔다.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는 카카티야 지배자 가나파티와도 싸웠다. 스리랑카는 1258년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 침공을 받았고, 그의 명령을 받은 자타바르만 비라 2세에 의해 1262년과 1264년에도 침공받았다.[44][45] 1270년에도 자타바르만 비라 2세에 의해 약탈당하고 패배했다.[46]
순다라 판디아 1세는 1268년 사망했고, 마라바르만 쿨라세카라 1세가 즉위했다. 1279년 호이살라 국왕 라마나타와 촐라 라젠드라 3세 연합군이 마라바르만 쿨라세카라 1세에 격파되었다. 촐라 제국, 호이살라 남부까지 지배한 그는 부파나이카바후 1세가 다스리던 스리랑카를 침공, 신성한 유물과 막대한 부를 가져왔다. 이후 스리랑카는 1308년까지 판디아 지배하에 있었다.
마라바르만 쿨라세카라 1세가 1310년 사망 후, 아들 비라 판디아 4세와 순다라 판디아 4세 간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져 내전이 발생했다. 마라바르만 쿨라세카라 1세는 비라 판디아 4세 계승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47] 이때 북인도 이슬람 국가 델리 술탄국이 판디아를 약탈했고,[48] 호이살라 국왕 발라라 3세도 판디아 내전에 개입, 침공했다. 그러나 발라라 3세는 델리 술탄국 장군 말리크 카푸르가 호이살라도 공격하자 수도로 후퇴했다. 발라라 3세를 쫓아낸 칼지 군대는 1311년 3월 판디아로 진군했으나, 두 형제는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 이들을 놓쳤다. 1311년 4월 말, 칼지는 추격을 중단하고 델리로 돌아가 약탈을 지속했다. 1312년, 판디아는 케랄라 남부 지배권도 상실했다.
델리 술탄군이 떠난 후, 비라 판디아와 순다라 판디아는 내전을 재개했다. 순다라 판디아는 패배 후 델리 술탄국에 도움을 요청, 아르콧 남부 지배권을 되찾았다. 1314년경 쿠르소 칸, 1323년 울구르 칸이 이끄는 술탄국 군대에 판디아는 연이어 약탈당했다. 울구르 칸은 판디아 영토를 병합했고, 남인도 대부분이 술탄국 지배하에 5개 지방으로 통치되었다.[49] 잘랄 우드-딘 하산 칸이 마바르 지방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50][51] 1334년 독립, 마바르 술탄국을 세웠다. 판디아는 마두라이에서 쫓겨나 텐카시로 수도를 옮기고, 16세기 말까지 소규모 영토를 유지하며 명맥을 이었다. 이때 판디아를 텐카시 판디아라고 부른다.[52]
비자야나가라 제국 부카 라야 1세가 1370년 마두라이를 정복하고 술탄을 가두었다. 그는 아르콧 왕자 삼부바 라야를 왕위에 올리고, 아들 비라 쿠마라 캄파나를 타밀 지방 총독으로 임명했다. 1378년, 마바르 술탄국은 비자야나가라가 임명한 나야크 총독들 지배를 받았다.[53] 1529년, 나야크 총독들은 독립을 선포하고 마두라이 나야크 왕조를 세웠다.
16세기, 텐카시 판디아마저 멸망했으나, 두 가문이 판디아 왕실 후계를 주장하며 존속했다. 푼자르 가문은 판디아 고대 혈족임을 주장했다. 촐라 황제 쿨로통가 1세 침략 때, 마니비크라마 쿨라세카라 왕자가 케랄라로 도망쳐 푼자르 가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17세기 후반, 푼자르 가문에 적통 후계자가 없어 사카라 가문 남자들을 양자로 들였다. 판달람 가문은 판디아 참파카누르 가문 왕자가 신하 음모를 피해 서고츠산맥으로 도망쳐 코니 지방에 정착, 903년 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12세기 촐라 침공 동안 판달람 지방으로 쫓겨났다. 18세기 이후 트라방코르 왕국에 통합되었으나, 현재까지도 이어지며 명망이 높다.
2. 1. 초기 판디아 (기원전 3세기 - 기원후 3세기)
초기 남인도 지역에서는 체라, 판디아, 촐라 세 국가가 타밀라캄에 본거지를 두고 카루르, 마두라이, 우라이유르 등에서 부족 연맹 형태로 번성하였다.[22] 이들은 무지리스, 콜카이, 카베리 등의 항구를 통해 로마 등 유럽 국가들과 무역을 하며[24] 부족 연맹체에서 왕국으로 발전하였다.[25]기원전 3세기경 북인도의 마우리아 제국 황제 아소카는 남인도와 스리랑카의 촐라, 판디아, 사티야푸트라, 케랄라푸트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26]
기원전 1세기 중반 하티굼파의 카라벨라 왕 석비에는 칼링가를 위협하던 '트라미라' 부족들에 대한 승리와 '판디아' 지방의 진주에 대한 언급이 있다. 당시 판디아는 진주와 비단 산업으로 유명했으며, 탐브라파니 강 유역의 콜카이 항에서 진주를 채취하고 알라간쿨람도 항구로 번성하였다.[27] 판디아에서는 동전들이 발굴되었고,[28] 기원전 2세기경 석비에는 왕실 보물에 대한 언급이 있다.[29]
판디아는 체라, 촐라 중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으며, 기원전 3세기 자료에는 판디아의 여왕이 세 부족체를 대표했다는 기록도 있다. 타밀인 지역 최고 중심지는 마두라이였다. 남인도 유적에서는 철제 용품, 상아 조각, 장신구, 로마 금화 등이 발견되었다.[30] 그리스와 로마는 기원전 1세기경 타밀계 국가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31] 타밀-브라흐미 비문에는 판디아의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의 역사가 간략히 적혀있다. 초기 판디아, 체라, 촐라는 칼라브라 왕국에 멸망당했다.[32]
초기 타밀 시에는 12명의 군주 이름이 나오는데, 그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33]
- 쿤 판디아
- 네둔젤리얀 1세
- 푼다 판디아
- 무두쿠두미 페루발루디
- 네둔젤리얀 2세
- 난 마란
- 네둔즈 첼리얀 3세
- 마란 발루디
- 카달란 발루티
- 무시리 무트리야 첼리얀
- 우키라프 페루발루디
2. 2. 전성기 (7세기 - 10세기)
판디아 왕조는 590년부터 620년까지 통치한 카둔곤 왕 재위 기간인 6세기 말에 전성기를 맞았다. 남인도에서 발굴된 벨비쿠디 동판에 의하면 카둔곤 왕은 '브라흐마에 대항하는' 칼라브라 왕들의 '파괴자'로 묘사되었으며,[34] 칼라브라가 쇠퇴함에 따라 판디아 왕조는 점차 세력을 키워나갔다. 반면에 촐라족은 상대적으로 본거지에 머물며 세력을 확장하지 않았다.6세기부터 9세기까지 남인도 지방은 팔라바 왕국, 찰루키아 왕국, 판디아 왕국으로 크게 나뉘었는데, 찰루키아는 이후 데칸 지방에서 발원한 라슈트라쿠타에 멸망당해 흡수당했다.[34] 판디아 왕국은 성장세를 거듭하고 있는 팔라바 왕국과 동맹을 맺었으며, 그 외에도 여러 데칸 지방의 왕국들과 동맹을 맺어 세를 키워나갔다. 9세기 중반에는 탄조르 동부에 있는 쿰바코남까지 영토를 확장하기도 하였다. 중기 판디아의 3대 국왕인 센단은 타밀나두 서부 지역에 살고 있던 체라 왕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4대 국왕인 아리케사리 마라바르만은 팔라바 왕국과 맞서 싸웠다. 팔라바 국왕이었던 나라심하바르만 1세는 판디아 왕국을 꺾었다고 자랑하기도 하였다. 찰루키아 국왕이었던 파라메스바라바르만 1세 비크라마디트야는 카베리 분지에서 팔라바 왕국과 싸웠으며, 아마도 판디아 왕국과도 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34]
찰루키아의 마지막 국왕인 키르티바르만 2세는 판디아 왕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남부 지방의 통제권을 잃어버렸다. 마라바르만 라자심하 1세나 네둔자다이얀 1세와 같은 판디아 국왕들은 팔라바 왕국을 위협하였고, 특히 네둔자다이얀 1세는 팔라바 왕국을 침공하여 타밀나두 서부 지방과 베나두 지방을 정복했다. 스리마라 스리발라바 왕은 스리랑카섬의 아누라다푸라 왕국으로 원정을 떠나 세나 1세를 죽이고 수도인 아누라다푸라를 약탈하였다.[34] 그러나 스리마라 스리발라바 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팔라바 왕국에 의하여 왕좌에서 쫓겨났고, 아누라다푸라 차기 국왕인 세나 2세는 보복 차원으로 판디아 지방을 공격하였다. 그는 수도 마두라이를 잿더미로 만들었고, 바라구나바르만 2세를 새로운 판디아 국왕으로 지명하였다.[34] 대략 825년부터 베나두 지방이 판디아 왕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으로 추측된다.[34]
단티바르만 국왕의 재위기에 팔라바 왕국의 영토는 남쪽에서 잠식해 들어오는 판디아 왕국의 침략으로 점차 줄어들었다. 하지만 난디바르만 3세는 강가와 촐라의 도움을 받아 판디아 세력을 몰아낼 수 있었다.[34]
판디아 국왕들의 계보는 아래와 같다.[34]
국왕 |
---|
카둔곤 |
마라바르만 아바니술라마니 |
첼리얀 센단 |
아리케사리 마라바르만 |
코 차다이얀 라나디라 |
마라바르만 라자심하 1세 |
파란타카 네둔자다이얀 1세 |
마라바르만 스리마라 스리발라바 |
바라구나바르만 2세 |
파란타카 비라나라야나 |
2. 3. 촐라 지배기 (10세기 - 13세기)
촐라 제국은 카베리 삼각주에서 세력을 키워 탄자부르를 장악했다. 촐라 황제 비자얄라야는 850년경 무타라이야르(타밀나두의 지방 귀족층)[35]를 공격하여 탄자부르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 판디아는 카베리강 북부 지역 통제력을 상실했다. 판디아 국왕 바라구나바르만 2세는 촐라로 진군했으나, 팔라바, 촐라, 강가족의 왕 프리티비파티 2세 연합군에게 880년경 쿰바코남 인근에서 대패했다.897년경, 촐라 황제 아디트야 1세는 팔라바, 강가, 콩구 지역을 지배했다. 아디트야 1세의 후계자 파란타카 1세는 910년 촐라군을 이끌고 판디아를 침공, 수도 마두라이를 점령했다. 판디아 국왕 라자심하 2세는 아누라다푸라의 도움을 받았으나 벨루르 전투에서 패배, 스리랑카섬으로 도주했다. 이후 판디아 왕실은 체라로 망명했다.
949년 라슈트라쿠타 연합군이 타콜람 전투에서 촐라를 격파하자, 남부 봉신국들이 독립을 선언하며 촐라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판디아 국왕 비라 판디아는 아누라다푸라 국왕 마힌다 4세와 동맹을 맺고 촐라를 두 번 공격했으나, 촐라 황제 순다라 파란타카 2세에게 패배하고 전사했다. 1005년경 촐라 황제 라자라자 1세는 판디아, 체라, 아누라다푸라 연합군을 격파하고 판디아를 마두라이에서 몰아냈다. 라자라자 1세의 후계자 라젠드라 1세 때부터 판디아는 촐라의 속국이 되었고, 촐라 출신 총독이 '촐라 판디아' 칭호를 받고 마두라이를 통치했다. 쿨로퉁가 황제 재위 초반, 촐라는 스리랑카 지배권을 상실했고, 판디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12세기 후반, 파라크라마 판디아 왕자와 쿠라세카라 판디아 왕자 간 내전이 발생했다. 스리랑카 왕국들과 체라 왕국은 쿠라세카라 편을 들었고, 라자디라자 2세, 쿨로퉁가 3세 등 촐라 황제들은 번갈아 가며 내분을 부추겼다.[36]
10세기와 11세기 초중반 판디아 국왕 목록은 다음과 같다.
국왕 이름 |
---|
순다라 판디아 1세 |
비라 판디아 1세 |
비라 판디아 2세 |
아마라부장가 티브라코파 |
마라바르만 파라크라마 촐라 판디아 |
자타바르만 촐라 판디아 |
스리발라바 마나쿨라찰라 |
마라바르만 스리발라바 |
파라크라마 1세 |
쿨라세카라 3세 |
비라 판디아 3세 |
자타바르만 스리발라바 |
자타바라만 쿨라세카라 1세 |
2. 4. 판디아 제국 (13세기 - 14세기)
판디아 제국은 남인도 지역 대부분과 스리랑카 전역을 통치한 거대한 제국이었다. 판디아 황제는 마두라이에 거주하며 황실 방계 후손들을 지방 총독으로 보내 제국 전역을 통치하였다. 황제를 포함한 황실의 여러 남성들이 제국을 나누어 지배했지만, 그중에서도 황제가 독보적인 통제권을 가졌다.[37]13세기에는 '엘라쿠 나야나르 - 만인의 군주'라고 불리는 여러 황제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여러 판디아 황족들과 함께 국가를 다스렸으며, 13세기 중반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 재위기에 황권이 정점에 달했다.[38]
- 마라바르만 순다라 1세
- 순다라바르만 쿨라세카라 2세
- 마라바르만 순다라 2세
-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
- 마라바르만 쿨라세카라 1세
- 순다라 판디아 4세
- 비라 판디아 4세
남인도에서 판디아의 우월성은 13세기 초 마라바르만 순다라 1세 때 확립되었다. 그는 1216년에 형 자타바르만 쿨라세카라로부터 황위를 계승했으며,[39] 촐라 제국을 침공하여 우라이유르와 탄자부르를 약탈하고 쿨로퉁가 1세를 몰아냈다.[40] 촐라 황제는 결국 마라바르만 순다라 1세에게 항복하고 그의 우위를 인정했다. 이후 즉위한 촐라 황제 라자라자 3세는 판디아의 침공을 막고 독립을 위해 호이살라 왕국의 나라심하 2세의 도움을 받아 카베리 계곡에서 판디아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마라바르만 순다라 1세는 패배했지만, 라자라자 3세는 촐라의 독립을 지켜냈다. 이후 촐라의 라젠드라 3세는 판디아를 공격하여 마라바르만 순다라 2세를 포함한 여러 판디아 귀족들을 꺾기도 했다. 호이살라 국왕 소메스바라는 판디아의 도움을 받아 라젠드라 3세를 꺾고 촐라 제국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2. 4. 1. 중흥기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는 1251년에 황위에 올랐고, 촐라 제국을 공격하여 스리랑카에서 케랄라 남부 지방까지도 진군하였다. 그는 호이살라 왕국의 지배를 미조르 평원에서 쫓아내는 데에 성공하기도 하였다. 부유한 도시 칸치가 당시 왕국에서 2번째의 수도로 기능하였다. 그의 원정 기간 동안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는 자타바르만 비라 판디아와 같은 여러 판디아계 고위 귀족들과 함께하였다.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는 라젠드라 3세를 1258년 즈음에 눌렀고, 그에게 공물을 바치도록 강요하였다. 1279년에는 라젠드라 3세와 함께 촐라의 통치도 끝나게 된다. 판디아는 카베리에서 호이살라를 공격하였으며, 카나누르 코팜 요새를 무너뜨렸다. 당시 호이살라 국왕이었던 소메스바라는 미조르 평원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남북으로 군사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던 호이살라 국왕은 결국 왕국 영토의 반을 그의 아들인 라마나타에게 물려주었다. 소메스바라 국왕은 결국 1262년에 판디아 군대에게 살해당했다. 라마나타는 카나누르 요새를 탈환하고자 하는데에는 성공하였다.[41][42][43]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는 이즈음 카다바의 지배자인 코페룬징가 2세와도 분쟁을 벌였다. 이 시기에 호이살라와 카다바의 전쟁통에 바나 주와 콩구 주가 판디아의 영역권으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는 카카티야의 지배자인 가나파티와도 싸웠다. 스리랑카는 1258년에 자타바르만 순다라 1세의 침공을 받았으며, 그의 명령을 받은 자타바르만 비라 2세에 의하여 1262년과 1264년에도 침공을 받았다.[44][45] 이후 1270년에도 자타바르만 비라 2세에 의하여 또다시 약탈당하고 패배하였다.[46]
순다라 판디아 1세는 1268년에 죽었고, 마라바르만 쿨라세카라 1세가 새로 즉위하였다. 1279년에 호이살라 국왕 라마나타와 촐라의 라젠드라 3세의 연합군이 마라바르만 쿨라세카라 1세에 의하여 격파되었다. 이들을 꺾고 거의 무적으로 불리게 된 마라바르만 쿨라세카라 1세는 촐라 제국, 호이살라의 남부 지역까지 모두 지배하였다. 그는 당시 부파나이카바후 1세가 다스리던 스리랑카를 침공하였으며, 그 곳에 있던 신성한 유물들과 막대한 부를 가지고 왔다. 이후 스리랑카는 1308년까지 판디아의 지배 하에 놓여있었다.
2. 4. 2. 제국의 쇠퇴
마라바르만 쿨라세카라 1세가 1310년에 죽은 후, 그의 아들들인 비라 판디아 4세와 순다라 판디아 4세 사이에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져 제국은 내전 상태에 빠졌다. 마라바르만 쿨라세카라 1세는 비라 판디아 4세가 왕위를 계승하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47] 이 시기에 북인도의 이슬람 국가인 델리 술탄국이 판디아 제국을 약탈하였고,[48] 호이살라의 국왕 발라라 3세도 판디아의 내전에 개입하여 침공하였다. 그러나 발라라 3세는 델리 술탄국의 장군 말리크 카푸르가 호이살라도 공격하자 자신의 수도로 후퇴하였다. 발라라 3세를 쫓아낸 칼지 군대는 1311년 3월에 판디아로 진군하였으나, 두 형제는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 델리 술탄국 군대는 이들을 놓쳤다. 1311년 4월 말, 칼지는 추격을 중단하고 델리로 돌아가 약탈을 계속하였다. 1312년, 판디아는 케랄라 남부에 대한 지배권도 상실했다.델리 술탄군이 떠난 후, 비라 판디아와 순다라 판디아는 다시 내전을 벌였다. 순다라 판디아는 패배 후 델리 술탄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 대가로 아르콧 남부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았다. 1314년경 쿠르소 칸, 1323년 울구르 칸이 이끄는 술탄국 군대에 의해 판디아는 연이어 약탈당했다. 울구르 칸은 판디아의 이전 영토를 병합했고, 이후 남인도 대부분 지역이 술탄국의 지배하에 5개 지방으로 나뉘어 통치되었다.[49] 잘랄 우드-딘 하산 칸이 새롭게 만들어진 마바르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50][51] 1334년 독립을 선언하고 마바르 술탄국을 세웠다. 판디아는 마두라이에서 쫓겨나 텐카시로 수도를 옮기고, 16세기 말까지 주변 소규모 영토를 유지하며 겨우 명맥을 이었다. 이 시기의 판디아를 텐카시 판디아라고 부른다.[52]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부카 라야 1세가 1370년 마두라이를 정복하고 술탄을 가두었다. 그는 아르콧의 왕자 삼부바 라야를 왕위에 올리고, 아들 비라 쿠마라 캄파나를 타밀 지방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1378년, 마바르 술탄국은 비자야나가라가 임명한 나야크 총독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53] 1529년, 나야크 총독들은 독립을 선포하고 마두라이 나야크 왕조를 세웠다.
2. 5. 후계
텐카시 판디아조차도 16세기에 완벽히 멸망하였으나, 2개의 가문들이 판디아 왕실의 후계를 주장하며 존속하였다.- 푼자르 가문: 판디아의 고대 혈족임을 주장하였다. 촐라 황제인 쿨로통가 1세가 판디아를 침략하였을 때, 마니비크라마 쿨라세카라 왕자가 이들을 피해 케랄라로 도망쳤다고 한다. 그 곳에서 왕자는 땅을 좀 얻었고, 푼자르라고 하여 새로운 가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는 푼자르 가문에도 더 이상 적통 후계자가 남아있지를 않았고, 결국 사카라 가문의 남자들을 양자로 들여 후계를 이어갔다. 이 가문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사회에서도 상당히 존경받고 있다.
- 판달람 가문: 판디아의 후계를 주장하는 또다른 가문이다. 전설에 의하면 판디아 참파카누르 가문의 한 왕자가 신하들의 음모를 피하여 서고츠산맥 지방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결국 그 왕자는 코니 지방에 정착했고, 903년에 자신만의 왕국을 세웠다는 것이다. 12세기에 촐라의 침공 동안 그들은 또다시 판달람 지방으로 쫓겨났다. 그들은 18세기 이후까지도 트라방코르 왕국에 통합되지 않았으나, 이후에는 통합되었다.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이 가문은 여전히 사회에서도 명망이 높다.
3. 경제
판디아는 남인도와 스리랑카 지역을 다스리며 고대 그리스 상인들과 활발한 교역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켰다. 특히 해상 교역로의 중요한 위치 덕분에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상인들이 반드시 거쳐가는 곳이었고, 이는 경제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판디아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은 진주 어업이었고, 항구도시 코카이는 진주 무역의 중심지였다. 진주는 로마 제국 등 외국 시장에서 높은 수요를 보였으며, 왕실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다.[55][56][57]
판디아 왕국의 초기 동전에는 호랑이, 물고기, 활과 같은 상징들이 새겨져 있었고, 후대에는 다양한 형태와 문양이 새겨진 동전들이 주조되었다.[58]
3. 1. 고대 무역
오늘날 남인도와 스리랑카 지역을 다스리던 판디아는 고대 그리스 상인들과 활발한 교역을 진행하였다. 고대 그리스 상인들은 판디아의 촐라, 체라계 가문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서양의 선원들은 이 부근에 여러 기지들을 세워 반영구적인 무역소로 만들기도 하였다. 남인도 지방과 그리스-로마 세계 간의 교역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이래 꾸준히 진행되었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난 이후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또한 남인도와 중동 지방 간의 관계는 동로마 제국이 7세기 경에 홍해와 이집트를 잃고 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판디아 지방은 워낙 남인도의 끄트머리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해상 교역로에서 필수적인 지정학적 위치를 점하는 이점을 누렸다. 상인들은 해로를 통하여 동남아시아로 향할 적에 판디아 지방을 반드시 거쳐갔고, 이로 힘입어 판디아 경제는 나날이 발전하였다.3. 2. 진주 채취
판디아에서 가장 번성했던 산업은 진주 어장 산업이었으며, 항구 도시 코카이는 진주 무역의 중심지였다. 그리스와 이집트 항해자들의 기록인 에리트레이안해의 페리푸스에는 "인도에서 소비되지 않는 질 낮은 진주는 아폴로가와 오마나의 시장에서 대량으로 수출된다"는 언급이 있다.[54] 타밀 지역에서 사용하지 않던 질 낮은 진주조차도 외국 시장에서 매우 큰 수요를 보였던 것이다. 진주는 아주 질 좋은 모슬린 천으로 포장되어 수출되었다. 로마 제국이 인도로부터 수입한 가장 비싼 제품은 만나르 만에서 나온 진주였으며, 판디아 왕국의 진주도 북인도 왕국에서 수요가 있었다.[55] 왕실의 전차를 끄는 말들조차 진주로 꾸며졌을 정도였으며, 진주의 사용량이 워낙 많아 진주 공급이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진주 어장에 대한 문헌에는 바다에 뛰어들어 상어의 공격을 피한 어부들이 어떻게 오른쪽으로 휘어진 껍질을 들고 소라 껍데기를 불었는지 등이 나타나 있다.[56] 메가스테네스는 판디아의 진주 어장에 대해 보고했는데, 이를 통해 판디아 제국이 진주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얻었음을 알 수 있다.[57]3. 3. 동전
판디아 왕국의 초기 동전에는 호랑이, 물고기, 활이 새겨져 있었다. 이 상징들은 당시 3명의 왕들의 상징이었는데, 각각 촐라, 체라, 판디아 왕국을 상징하던 것이다. 후대에 주조된 동전은 구리 동전에 은으로 된 펀치마크가 찍혀진 형태였다.[58] 이후 판디아 통치자들의 상징이 새겨진 몇 개의 금화도 발굴되었으며, 이 동전들에는 물고기 이미지가 하나 또는 둘 새겨져 있었다. 이처럼 물고기 기호를 가진 동전은 '코단다라만'과 '칸치 발랑금 페루말'이라고 불렸다. 이 외에도 '엘람탈라이야남'은 한쪽 면에는 서 있는 왕이 있고 다른 한쪽에 물고기가 있는 동전을 뜻하며, '코네니라얀'은 황소가 있는 동전, '칼리가라만'은 발 한 쌍을 그린 동전을 뜻한다.어떤 동전들에는 순다라, 순다라 판디아, 혹은 약칭으로 수(Su)라고 적혀있었다. 그 외의 동전들에는 비라 판디아 등이 새겨져 있었다. 이 동전들은 판디아와 촐라족의 영주들에 의하여 주조되었으나, 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해도 그 왕의 재위기에 만들어진 것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판디아 왕국의 동전은 기본적으로 사각형이었고, 한 면에는 코끼리가 새겨져 있었으며 반대쪽은 밋밋하게 아무 장식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판디아 시기에 제작된 금화와 은화처럼 가치가 높은 것들은 타밀어로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으며, 동전에는 타밀족의 전설들이 간략하게 새겨져 있었다.
4. 종교
초기 판디아 통치자들은 자이나교를 믿다가 어느 시점에서 힌두교로 개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비슈누파와 시바파 모두에서 바크티 운동을 지지했다.[59] 판디아의 힌두교는 사원 중심의 엘리트 형태, 대중적인 바크티 종교, 지역 형태의 힌두교 세 가지가 존재했다.[60] 비슈누와 시바 신에 대한 숭배는 엘리트 계층의 지지를 받았으며, 바크티 운동은 신과 신자 사이의 강렬한 정서적 애착을 강조했다.[61] 판디아국에는 마두라이의 미나크시 사원을 비롯한 여러 사원이 있었으며,[62] 사원은 타밀 경제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63]
4. 1. 힌두교의 형태
초기 판디아 통치자들은 자이나교를 믿다가 어느 시점에서 힌두교로 개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힌두교의 비슈누파와 시바파 모두에서 바크티 운동을 지지했다.[59]판디아의 힌두교는 사원 중심의 엘리트 형태, 대중적인 바크티 종교, 그리고 훨씬 더 널리 퍼진 지역 형태의 힌두교, 이렇게 세 가지가 존재했다.[60] 이 세 가지는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비슈누와 시바 신에 대한 숭배는 일반적으로 엘리트 계층의 지지를 받았으며, 시바 신은 나중에 엘리트 계층의 지지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바크티 운동은 신과 신자 사이의 강렬한 정서적 애착을 강조했다.[61]
판디아국에는 마두라이의 미나크시 사원을 비롯한 여러 유명한 사원이 있었으며,[62] 판디아국에서 가장 큰 고용주이자 지주였던 사원은 타밀 경제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63] 사원은 일반적으로 은행, 학교, 진료소, 빈민촌의 역할도 포함하여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다. 벽으로 둘러싸인 판디아국의 대규모 사원 단지에는 여러 행정 사무소와 시장도 있었다.[63]
4. 2. 사원의 역할
초기 판디아 통치자들은 자이나교를 믿다가 어느 시점에서 힌두교로 개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힌두교의 비슈누파와 시바파 모두에서 바크티 운동을 지지했다.[59]판디아의 힌두교는 사원 중심의 엘리트 형태의 힌두교, 대중적인 바크티 종교, 그리고 훨씬 더 널리 퍼진 지역 형태의 힌두교 세 가지가 존재했다.[60] 이 세 가지는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비슈누와 시바 신에 대한 숭배는 일반적으로 엘리트 계층의 지지를 받았으며, 시바 신은 나중에 엘리트 계층의 지지를 받았다. 바크티 운동은 신과 신자 사이의 상호 강렬한 정서적 애착을 강조했다.[61]
판디아국에는 마두라이의 미나크시 사원을 비롯한 여러 유명한 사원이 있었으며,[62] 판디아국의 가장 큰 고용주이자 지주였던 사원은 타밀 경제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63] 일반적으로 사원은 은행, 학교, 진료소, 빈민촌의 역할도 포함하여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다. 벽으로 둘러싸인 판디아국의 대규모 사원 단지에는 여러 행정 사무소와 시장도 있었다.[63]
5. 문학
상감 문학은 타밀계 학자와 시인들이 모여 토론과 문학회를 여는 아카데미인 상감을 바탕으로 발달하였다. 그 중 '탈라이얄랑가의 승리자'인 네둔젤리얀 2세와 '희생의 무두쿠디미 페루발루디'가 특별하게 언급된다. 전통 타밀 시 형태인 아카누루와 푸라누루에서 발견되는 몇 편의 짧은 시 외에도, 상감 문학 중 판디아 왕국의 사회와 상업 활동을 엿볼 수 있는 두 개의 주요 작품인 《마투라이칸키》와 《넷발트바타》가 있다. 이 작품들에서 작가 만쿠디 마루타나르는 그의 후원자인 네둔체지얀 왕을 코카이의 영주로, 남부 파라다바의 군벌로 언급하고 있다. 《실라파티카람》은 판디아 왕국의 상징이 물고기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6. 건축
바위를 잘라 사원을 건축한 것은 판디아 건축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다. 타밀나두의 티루치라팔리 지역에는 판디아 왕국이 지은 작은 사원들이 무리지어 건축되어 있으며, 시바 사원에는 성우 난디의 조형물이 있다. 후기 판디아 시대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비마나(탑 형태로 지어진 힌두교 사원)의 고푸람(사원의 직사각형 입구와 문)이 개발되었다. 마두라이의 미나크시 암만 사원과 티루넬벨리의 넬리아파르 사원도 판디아 시대에 지어졌다.[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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